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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가마꾼 (한국한시)

by happyssony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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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꾼(肩輿歎)

정약용(丁若鏞)

 

人知坐輿樂(인지좌여락) 사람들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不識肩輿苦(불식견여고)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

肩輿山峻阪(견여산준판) 가마 메고 험한 산길 오를 때면,

捷若蹄山麌(첩약제산우) 빠르기가 산 타는 노루와 같고

肩輿不懸崿(견여불현악) 가마 메고 비탈길 내려올 때면,

沛如歸笠羖(패여귀립고) 우리로 돌아가는 염소처럼 재빠르네.

肩輿超谽谺(견여초함하) 가마 메고 깊은 골짜기 건너갈 때면,

松鼠行且舞(송서행차무) 다람쥐도 덩달아 같이 춤추네.

側石微低肩(측석미저견) 바위 옆을 지날 때에는 어깨 낮추고,

窄徑敏交服(착경민교복) 오솔길 지날 때에는 종종걸음 걸어가네.

絶壁頫黝潭(절벽부유담) 검푸른 저수지 절벽에서 내려다볼 때는,

駭魄散不聚(해백산불취) 놀라서 혼이 나가 아찔하기만 하네.

快走同履坦(쾌주동리탄) 평지를 밟듯이 날쌔게 달려

耳竅生風雨(이규생풍우) 귀에서 바람 소리 쌩쌩 난다네.

所以游此山(소이유차산) 이 산에 유람하는 까닭인즉슨

此樂必先數(차악필선수) 이 즐거움 맨 먼저 손꼽기 때문

紆回得官岾(우회득관점) 근근히 관첩(官帖)을 얻어만 와도

役屬遵遺矩(역속준유구) 역속(役屬)들은 법대로 모셔야 하는데

矧爾乘傳赴(신이승전부) 하물며 말타고 행차하는 한림(翰林)에게

翰林疇敢侮(한림주감모) 누가 감히 못 하겠다 거절하리오.

領吏操鞭扑(영이조편복) 고을 아전은 채찍 들고 감독을 맡고,

首僧整編部(수승정편부) 수승(首僧)은 격식 차려 맞을 준비하네.

迎候不差限(영후불차한) 높은 분 영접에 기한을 어길쏘냐,

肅恭行接武(숙공행접무) 엄숙한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네.

喘息雜湍瀑(천식잡단폭) 가마꾼 숨소리 폭포 소리에 뒤섞이고

汙漿徹襤褸(오장철람루) 해진 옷에 땀이 베어 속속들이 젖어 가네

度虧旁者落(도휴방자락) 외진 모퉁이 지날 때 옆엣놈 뒤처지고,

陟險前者傴(척험전자구) 험한 곳 오를 때엔 앞엣놈 허리 숙여야 하네.

壓繩肩有瘢(압승견유반) 밧줄에 눌리어 어깨에 자국 나고,

觸石趼未瘉(촉석견미유) 돌에 채여 부르튼 발 미쳐 낫지 못하네.

自痔以寧人(자치이영인) 자기는 병들면서 남을 편케 해 주니,

職與驢馬伍(직여려마오) 하는 일 당나귀와 다를 바 하나 없네.

爾我本同胞(이아본동포) 너나 나나 본래는 똑같은 동포이고,

洪勻受乾父(홍균수건부) 한 하늘 부모삼아 다 같이 생겼는데,

汝愚甘此卑(여우감차비) 너희들 어리석어 이런 천대 감수하니,

吾寧不愧憮(오녕불괴무) 내 어찌 부끄럽고 안타깝지 않을쏘냐.

吾無德及汝(오무덕급여) 나의 덕이 너에게 미친 것 없었는데,

爾惠胡獨取(이혜호독취) 내 어찌 너의 은혜 혼자 받으리.

兄長不憐弟(형장불련제) 형이 아우를 사랑치 않으니,

慈衰無乃怒(자쇠무내노) 자애로운 어버이 노하지 않겠는가.

僧輩楢哿矣(승배유가의) 중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요.

哀彼嶺不戶(애피령불호) 영하호(嶺下戶) 백성들은 가련하고나.

巨槓雙馬轎(거공쌍마교) 큰 깃대 앞세우고 쌍마(雙馬) 수레 타고 오니,

服驂傾村塢(복참경촌오) 촌마을 사람들 모조리 동원하네.

被驅如太鷄(피구여태계) 닭처럼 개처럼 내몰고 부리면서,

聲吼甚豺虎(성후심시호) 소리치고 꾸중하기 범보다 더 심하네.

乘人古有戒(승인고유계) 예로부터 가마 타는 자 지킬 계율 있었는데,

此道棄如土(차도기여토) 지금은 이 계율 흙같이 버려졌네.

耘者棄其鋤(운자기기서) 밭 갈다가 징발되면 호미 내던지고

飯者哺以吐(반자포이토) 밥 먹다가 징발되면 먹던 음식 뱉어야 해.

無辜遭嗔暍(무고조진갈) 죄 없이 욕먹고 꾸중들으며,

萬死唯首俯(만사유수부) 일만 번 죽어도 머리는 조아려야.

顦顇旣踰艱(초췌기유간) 병들고 지쳐서 험한 고비 넘기면,

噫吁始贖擄(희우시속로) 그 때야 비로소 포로 신세 면하지만,

浩然揚傘去(호연양산거) 사또는 일산(日傘)쓰고 호연(浩然)히 가 버릴 뿐,

片言無慰撫(편언무위무) 한 마디 위로의 말 남기지 않네.

力盡近其畝(역진근기무) 기진 맥진하여 논밭으로 돌아오면

呻唫命如縷(신금명여루) 지친 몸 신음 소리 실낱같은 목숨이네.

欲作肩與圖(욕작견여도) 이 가마 메는 그림 그려

歸而獻明主(귀이헌명주) 임금님께 돌아가서 바치고 싶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 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襲翁) 태수(苔戒)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

 

1776(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寅)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등이 실려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작품 해설

 

정약용이 귀양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와 있을 때(1832)지은 작품으로, 백성들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풍자성이 강하게 나타나 모순된 시대 현실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적 태도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작자는 먼저 관리의 가마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는 영하호(嶺下戶) 주민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 후,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는 관리들의 도덕적 무감각을 강하게 질타한다. 이런 비판 속에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작자의 진보적인 의식이 숨어 있다. 작자는 이러한 논리를 임금에게까지 적용시킨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임금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마 메는 괴로움을 강요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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