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이원익
작품 해제
문답가(問答歌) 계열의 가사로서 허전의 <고공가(雇工歌)>에 화답하는 형식의 작품이며 ‘고공답가(雇工答歌)’라고도 한다. 명신(名臣)이었던 이원익이 임진왜란을 겪은 후 지었다 하며, 순조 때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잡가(雜歌)>라는 노래책에 실려 전한다. 작자가 영의정을 어른 종에 빗대어, 상전인 임금의 말을 듣지 않는 종과 머슴들을 꾸짖고 어른 종의 말을 듣지 않는 상전을 간(諫)하였다. 총 86구로 되어 있다. 집안를 다스리는 도리는 주인을 위하여 머슴들이 먼저 열심히 일해야 하고, 주인은 집안을 바로 잡기 위해 종들을 휘어잡아야 한다고 했다. 종들을 휘어잡는 방법으로는 상벌을 분명히 해야 하고, 상벌을 공평하게 하려면 어른 종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임란 이후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고, 당파 싸움에만 열중하고 있는 실정을 개탄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고공가>보다는 현실을 자세히 분석하고, 왕이 신하들의 충간을 들어준다면 국운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우의적인 표현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와 져 양반아 도라안자 내 말 듯소
엇지한 져믄 소니 헴 업시 단니산다
마누라 말쌈을 아니 드러 보나산다
나는 일얼탄뎡 외방의 늙은 툐(僕) 이
공밧치고 도라갈 제 하난 일 다 보앗네
우리 댁 셰간이야 녜부터 이러튼가
전민(田民)이 만탄 말이 일국(일국)에 소래나데
먹고 입난 드난죵이 백 여구 나마시니
므삼 일 하노라 터밧츨 무겨난고 농잔 업다 하는가
구절풀이
* 엇지 한 : 어찌하여, 어째서 * 져믄 소니 : 젊은 나그네가 * 헴업시 : 헤아림이 없이, 생각 없이 * 단니산다 : 다니는가? * 마누라 : 여기서는 임금을 비유함 * 보나산다 : 보았느냐 * 일얼탄뎡 : 이럴지언정 * 늙은 툐이 : 늙은 종(僕)이, ‘툐이’는 오기(誤記) * 공밧치고 : 공물(供物)을 바치고 * 셰간 : 세간, 살림살이 * 전민(田民) : 농민 * 일국에 소래나데 : 한 나라 안에 유명한데 * 먹고 입난 드난죵 : 먹고 자며 일하는 하인 * 터밧츨 : 텃밭을 * 무겨난고 : 묵혀놓았는가?, 논밭을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는가? * 농잔 : 농토, 농장
현대어 풀이
아아! 저 양반아 돌아앉아 내 말 좀 들어보오. 어찌하여 젊은 손님이 생각 없이 다니는 것인가. 마누라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나는 이럴지언정 외방의 늙은 종이 공물을 바치고 돌아갈 때 하는 일을 다 보았다네. 우리 집 살림이 예로부터 이랬던가. 농민이 많단 말이 한 나라에 소문이 났는데, 먹고 입으며 고공살이 하는 종이 백 여 사람이 남짓한데도, 무슨 일을 하느라고 텃밭을 묵혀 놓고 농토가 없다 하는가.
호미연장 못 갓던가
날마다 무삼하려 밥먹고 단기면셔
열 나모 정자 아래 낫잠만 자나산다
아이들 타시런가 우리 댁 종의 버릇
보거든 고이하데 쇼먹이난 아이들이
샹마름을 능욕하고 진지하난 어린 손네
한 계대를 긔롱 한다
삐삐름 제급 못고 에에로 제 일하니
한집의 수한 일을 뉘라셔 심써 할고
구절풀이
* 못갓던가 : 갖추지 못 했는가 * 무삼하려 : 무엇을 하려고 * 단기면셔 : 다니면서 * 열나모 정자 : 열 그루의 나무가 심어진 정자 * 자나산다 : 자는가 * 고이하데 : 괴이(怪異)하구나, 이상하구나 * 쇼먹이난 : 소를 치는, 소를 먹이는 * 샹마름 : 지주대신 땅을 관리하는 마름들의 우두머리 * 진지하난 : 진퇴하는, 오고가는 * 한 계대 : 큰 겨레, 양반 * 긔롱 한다 : 기롱(欺弄)한다. 웃으며 놀린다 * 삐삐름 : 삐뚜름하게, 옳지 못하게 * 제급 못고 : 물건을 빼돌려 모으고 * 에에로 : 엉뚱한 꾀로 * 수한 일 : 많은 일, 숱한 일 * 심써 할고 : 힘을 써서 일을 할 것인가?
현대어 풀이
호미 연장을 못 갖추었는가, 날마다 무엇 하려 밥만 먹고 다니면서 열 나무 정자 아래 낮잠만 자는가, 아이들 탓이든가 우리 집 종의 버릇 보자 하니 괴이하구나. 소먹이는 아이들이 상마름을 업신여겨 욕보이고, 왕래하는 어리석은 손님이 양반을 실없는 말로 빗대어 희롱하는가. 옳지 못하게 물건을 빼돌려 모으고 다른 꾀로 자기 일만 하니, 큰집의 수많은 일을 누가 힘써 할 것인가.
곡식고(穀食庫) 비엿거든 고직인들 어이 하며
셰간이 흐터지니 딀자힌들 어이 할고
내 왼 줄 내 몰라도 남 왼 줄 모랄넌가
플치거니 밋치거니 할거니 돕거니
하로 열두 때 어수선 핀거이고
밧별감 만하 이사 외방사음(外方舍音) 도달화(都達化)도
제 소임 다 바리고 몸 끄릴 뿐이로다
구절풀이
* 곡식고(穀食庫) : 곡식창고 * 고직인들 : 고직(庫直)이인들, 창고지기인들 * 셰간이 흐터지니 : 세간(살림살이)이 흩어지니 * 딀자힌들 : 질그릇인들 * 내 왼 줄 : 내가 그릇된 줄 * 플치거니 밋치거니 : 풀어헤치거나 맺거나 * 할거니 돕거니 : 헐뜯거니 돕거니 * 하로 열두 때 : 하루 온종일(예전에는 하루가 12시간이었음) * 밧별감 : 바깥별감, 액정서에 딸린 예속으로서 좌수의 다음자리. 남자 하인끼리 서로 부르던 호칭 * 외방사음(外方舍音) : 바깥마름 * 도달화(都達化) : 달화주, 종을 부리는 대신에 세금을 받던 사람 * 몸 끄릴 : 몸을 사릴
현대어 풀이
곡식창고가 비었거든 창고를 지키는 사람인들 어찌 하며, 세간 살림이 흐트러지니 질그릇인들 어찌 할 것인가. 자신의 잘못은 몰라도 남의 잘못을 모르겠는가. 풀어헤치거니 맺거니 헐뜯거니 돕거니 하루 온종일 수선을 피는 것인가. 외별감만 많이 있어 마름 대신에 세금을 받던 도달화도 제 소임을 다 버리고 몸만 사릴 뿐이로다.
비 새여 셔근 집을 뉘라셔 곳쳐 이며
옷 버서 무너진 담 뉘라셔 곳쳐 쓸고
블한당 구모 도적 아니 멀니 단이거든
화살 찬 수하상직(誰何上直) 뉘라셔 심써 할고
큰니큰 기운 집의 마누라 혼자 안자
긔걸을 뉘 드르며 논의을 눌라 할고
낫시름 밤근심 혼자 맛다 계시거니
옥 가튼 얼굴이 편하실 적 면 날이리
구절 풀이
* 비새여 : 비가 새어 * 셔근 집 : 썩은 집 * 이며 : (지붕을) 이며 * 옷 버서 : 옷을 벗어, 즉 허물어지고 낡아 * 곳쳐 쓸고 : 고쳐서 쌓을까 * 구모 도적 : 구멍으로 들락거리는 도적, 여기서는 왜적을 말함 * 수하상직(誰何上直) : ‘누구냐’하고 외치는 상직군, 상직(上直)이란 벼슬아치가 당직이 되어 관가에서 잠을 자거나 종이 집 안에 살면서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함 * 심써 할고 : 힘써 일을 할까 * 큰니 큰 기움 집 : 크나크게 기운이 쇠하여진 집 * 긔걸 : 명령, 분부 * 드르며 : 들으며, 명령을 이행하며 * 눌라 할고 : 누구와 할까 * 맛다 계시거니 : 맡아 계시니, 맡고 계시니 * 면 날이리 : 몇 날이나 될까, 즉 편할 날이 없다
현대어 풀이
비가 세어 썩은 집을 누가 고쳐서 이며, 다 헤어져 무너진 담을 누가 고쳐 쌓을 것인가. 불한당 같은 구멍 도적이 멀리 다니지 아니 하거든, 화살을 찬 상직군은 누가 힘써 할 것인가. 크나크게 기울어진 집에 마누라 혼자 앉아하는 분부를 누가 들으며, 논의를 누구와 할 것인가. 낮과 밤의 많은 근심을 혼자 맡고 계시니 옥 같은 고운 얼굴이 편하실 적이 몇 날일까.
이 집 이리 되기 뉘 타시라 할셔이고
헴 업는 종의 일은 뭇도 아니 하려니와
도로혀 혜여하니 마누라 타시로다
내 항것 외다 하기 종의 죄 만컨마는
그러타 뉘을 보려 민망하야 삷나이다
삿꼬기 마르시고 내 말삼 드로쇼셔
집 일을 곳치거든 종들을 휘오시고
종들을 휘오거든 상벌을 발키시고
상벌을 발키거든 어른 종을 미드쇼셔
진실노 이리 하시면 가도(家道) 절노 닐니이다.
구절 풀이
* 할셔이고 : 할 것인가 * 헴 업는 : 헤아림이 없는, 생각이 없는 * 뭇도 : 묻지도 * 도로혀 : 돌이켜 * 항것 : 주인, 상전 * 외다 하기 : 그르다 하기, 잘못했다 하기 * 그러타 : 그렇다고 * 뉘을 보려 : 세상을 보려, 세상 사람들을 대하려 * 삷나이다 : 아룁니다. 여쭙니다 * 삿꼬기 마르시고 : 새끼 꼬기를 잠시 멈추시고 * 곳치거든 : 고치시려거든 * 휘오시고 : 휘어잡으시고 * 상벌을 발키시고 : 상과 벌을 분명히 하시고 * 어름죵 : 어른 종 * 가도(家道) : 집안의 법도 * 닐니이다 : 일어날 것입니다. 흥할 것입니다
현대어 풀이
이 집이 이리 된 것을 누구의 탓이라 할 것인가. 헤아림 없는 종의 일은 묻지도 아니 하려니와, 돌이켜 헤아려 보니 모든 일이 마누라 탓이로다. 내 주인 잘못되었다 하기에는 종의 죄가 많다고 하겠지만 세상 사람들을 대하려니 민망하여 여쭈나이다. 새끼 꼬는 일을 멈추고 내 말을 들어보소. 집일을 고치려거든 종들을 잘 휘어잡으시고, 종들을 휘어잡으시려거든 상벌을 밝히시고, 상벌을 밝히시려거든 어른 종을 믿으소서. 진실로 이렇게 하시면 집안의 도가 저절로 일어서리라.
핵심정리
성격 : 풍유적
창작 배경 : 허전의 <고공가>에 화답한 가사
주제 :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풍유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때 대동법 실시를 건의, 실시케 했고, 불합리한 조세 제도를 시정했다. 안주목사 때 군병방수제도를 개혁, 복무를 2개월로 단축, 법제화시켰다.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 판서, 이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을 선도하고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문장에 뛰어났고,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해설
조선 선조 때 이원익이 지은 가사로서 <고공가(雇工歌)>에 대한 문답가 형식의 가사이다. 전체적으로 우의적(寓意的)인 작품인 <고공가(雇工歌)>에 화답하는 노래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주제와 문체, 표현기교를 구사하고 있다. <고공가>가 주인이 머슴을 꾸짖는 내용이라면, <고공답주인가>는 어른 종의 입장에서 안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머슴들을 꾸짖고, 안주인에게는 집안의 법도를 일으키기 위한 충언을 하는 형식이다. 여기에서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지 못한 신하, ‘드난 종’ 곧 벼슬을 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는 신하, ‘마누라’는 선조, ‘어른 종’은 작자 자신을 포함한 높은 벼슬아치들을 각각 비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하들을 '드난 종'에 비유하여 텃밭을 묵혀놓고 밥만 먹고 낮잠만 잔다고 꾸짖고, 지방관청의 이속(吏屬)들을 '소먹이는 아이들'에 비유하여, '마름'으로 비유된 지방관청의 수령들을 능욕하니 곡식창고는 비게 되고 살림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며 한탄한다. 게다가 ‘외별감’, ‘외방사음(外方舍音)’, ‘도달화(都達花)’ 등 곧 변방을 지키는 무관들마저 맡은 임무에는 소홀하고 제 몸만 사리고 있으니, “누가 힘써 나라를 방어할 것인가”하며 개탄하고 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국고가 텅텅 비는 궁핍화된 현실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즉 이 작품은 한 나라의 기강을 농사짓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하여 비유하고 ‘마누라’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들인 대소 신료(臣僚)들을 꾸짖고, ‘마누라’인 임금에게는 ‘어른 종’인 정승, 판서들을 믿고 신상필벌의 엄한 법도를 세우라는 비판과 충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공가>에서 보여주는 단순한 현상파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대책을 제언함으로써 국가 기강의 확립과 국가 경제의 충실을 도모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