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에서
정 약 용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이고 그 아들은 10명이라고 하자. 그 들 중 한 아들은 전지 3경을 얻고, 두 아들은 2경을 얻고, 나머지 네 아들은 전지를 얻지 못하여 울면서 길거리에서 뒹굴다가 굶어죽게 된다면 그 사람을 부모 노릇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이 백성을 내릴 적에 먼저 전지를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먹고살게 하였고, 또 한 백성을 위하여 군주(君主)와 목민관(牧民官)을 세워 그들의 부모가 되게 하였으며, 백성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함께 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팔짱만 끼고 앉아 아무 일도 안 한다면, 그 아들이 서로 싸워서 재산을 빼앗고 자기에게 합치는 일을 못하게 막을 자는 누구란 말인가? 힘센 자 는 더 많이 얻게 되고 약한 자는 떠밀리어 땅에 넘어져 죽게 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 된 자는 남의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함께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사람이요,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여 다같이 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직무를 저버린 사람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갖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갖지 못하게 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공장(工匠)은 그들이 만든 기구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고 상인은 화물(貨物)로써 양곡을 사게 되면 아무 지장이 없게 된다.
선비는 열 손가락이 유약하여 힘든 작업을 감당하지 못하니 밭을 갈겠는가, 김을 매겠는가, 거름을 주겠는가? 그들의 이름이 노동 기록 장부에 기록되지 못하면 가을에 곡식 분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내가 여전법(閭田法)을 시행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 선비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찌하여 선비는 손발도 놀리지 아니하고 땅에 생산 된 것을 빼앗아 먹으며 남이 노동한 것을 삼켜 먹는가?
대저 선비가 놀고 먹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이(利)가 다 개척되고 있다. 놀고서는 곡식을 분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장차 직업을 옮겨 농사를 지을 것이다. 선비 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땅에서는 이(利)도 개척되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난민(難民)도 없어질 것이다.
선비 중에는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서 농사꾼으로 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공장(工匠)과 상인으로 변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아침에 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옛 사람의 서적을 읽는 자도 있을 것이며, 부유한 사람의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살길을 구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실리(實利)를 강구(講究)하여 토지에 적합한 농작물을 분별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며 기구를 제작하여 인력을 덜어주기도 하고 농사 기술과 목축업을 가르쳐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그 공을 어찌 육체 노동하는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루의 일을 열흘로 기록하고 열흘 동안 한 일을 백일로 기록하여 그에 따라 곡식을 분배받아야 옳을 것이다. 선비에게 어찌 분배가 없겠는가?
경세유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국가 체제 전반을 비판하고 부국강병을 논한 책. 44권 15책. 필사본. 1817년(순조 17) 강진(康津)에 유배중에 착수, 이듬해 완성하였다. 지배층의 기강 해이, 국가재정의 궁핍, 토지제도의 문란, 농민층에 대한 조세 가중 등을 비판하고 그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정약용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 ․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襲翁) ․태수(苔戒)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
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寅)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